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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고>새 시대를 열어갈 가정문화를 생각한다-----이진배
등록일 2004-05-14 00:00:00 조회수 3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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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 사보 [KAI] 2004년 5월호

새 시대를 열어갈 가정문화를 생각한다

이진배(문화시민운동중앙협의회 사무총장)


가족은 혈연관계이다. 가족은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된다. 부모와 자녀들로 이루어진 혈연관계는 인류의 오랜 역사시대를 관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역사 속에서 가족은 인간사회의 기본단위로서 관습적 생활의 모체가 되어왔다. 근대화 이전 단계의 대가족주의라든가 집성촌이라든가 하는 관습적 생활양식은 혈연을 토대로 구축된 거대한 성채와 같았다.
현재 대가족주의는 종중 재산이나 시제와 같은 형태로 남아있다. 동성동본의 집성촌은 도시화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조상들 성묘 때나 집성촌의 혈연들은 선산의 산소 앞에서 그나마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대가족과 집성촌이 해체된 지금도 가족은 인간사회의 기본단위이다. 혈연을 기초로 한 가족의 개념 역시 똑같다. 그러나 생활방법과 환경변화에 따라 대가족 대신 핵가족이 보편화되었다. 대가족은 엄격한 권위주의로 구성원간의 집단적 위계질서를 유지했으나, 핵가족은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수평적 질서를 선호한다. 핵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인격이 어떤 이유로든 존중되지 않는 경우 높은 이혼율에서 보듯이 핵가족 자체의 존립은 위태롭게 되었다.
인간존중을 생명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질서 속에서 핵가족은 합당한 귀결일 수 있다. 그러나 핵가족은 반드시 인간존중의 보루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핵가족은 산업화 도시화에 의한 물질주의 시장원리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며, 치열한 경쟁을 촉발하는 과밀관계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가족시대 가족은 서로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공동체이자 정신적 고향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핵가족 시대의 가족은 현대사회의 고독과 소외로부터 개인을 감싸 줄 쉼터(shelter)의 의미가 크다. 대가족 시대에는 가족들이 모여 한솥밥 생활을 영위하는 정서적 관계이자 공간으로서 가정을 크게 의식할 필요가 없었으나, 핵가족에 이르며 가정은 정서적으로 불안해지고 공간적으로 외부와 칸막이를 해야 하는 만큼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절실하게 되었다.
현대가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아파트, 직장, 맞벌이, 가정폭력, 이혼, 미혼모 등은 핵가족 시대의 가정문화의 현주소가 어디쯤인가 말해준다. 인간존중의 가치가 살아 숨쉬어야 할 가정은 이와 같은 위험과 도전들로 둘러싸여 있다.
가정은 오래 전부터 인간을 길러내왔다. 가정은 유아기로부터 한 인간의 인격을 형성한다. 평생을 통해서 사람은 가정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체득한 습관이나 관습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가정(home)은 가족(family)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공간이상으로 문화적 교양의 교사가 된다. 가정은 그 자체로 문화를 축적하고 생산할 뿐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문화를 교류하고 확대시키는 기본 틀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가족이 가문으로 진화하고 가문의 영광을 추구하는 문화현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저서가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70년대까지도 매우 강하게 이 사회를 움직여왔다. 가족의 혈연은 절대적 가치로써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모는 자녀교육을 위해 논밭과 소를 팔았으며, 형과 누나는 열악한 공장에서 혹은 몸을 팔아서까지 어려운 가계를 떠맡았다. 지금 이와 같은 가족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매우 시대착오적이다. 현재의 가정은 그러한 가족관계를 뿌리 채 뽑아버리고 있다. 가족은 각기 가정의 주인으로 상하적 권위나 위계질서, 맹목적 희생정신에 대해 부정적이다.
과거의 가정문화가 민주적 가치에 의해 새로운 가정문화로 교체돼가고 있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교체과정이 안정되지도 아니한 상황에서 우리는 세계화․정보화로 이름 지어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다. 정보화 직장, 전자화 가정이 대두되고 있고, 가족과 가정을 지탱해주는 시간과 공간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대한 지표들로서 노인, 출산, 입양, 여가에 대한 인식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문화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새 시대 문화현상 역시 가정에서 길러지는 한 인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새 시대의 문화현상이 인간존중에 역행하고 인간정신과 사회윤리를 파괴하는 데로 흘러간다면, 그것은 가정문화의 우선적 책임이 된다.
여기에 사회의 노령화, 다양성과 역동성의 증대로 불가피해지고 있는 자녀교육과 경쟁의 문제, 남녀구별이 없이 개성에 따라 성취감을 얻고자 하는 경제활동 가정의 균형 속에서 가족 구성원이 개별적 욕구를 충족하고 싶은 기대감 등은 잠시도 쉬지 않고 가족관계와 가정의 공동체적 나눔을 흔들어대고 잇다.
인간의 무한욕망을 자극하는 풍요 속의 소비문화와 그와 대비되는 정신적 빈곤, 이기적 물질주의의 인터넷과 첨단 미디어의 현란한 행진곡 속에 인간존중의 가정문화는 시들어 갈 수밖에 없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가족 구성원은 각자의 인터넷과 TV와 온갖 전자매체로 무장하고 있고, 가정 공동체의 상징인 식탁은 외로운 의자들로 쓸쓸해지고 있다. 쉼터로서의 가정을 피난처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가족 구성원 간의 기대는 갈등으로 변하고, 가정의 행복은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가 될지도 모른다.
세계화․정보화는 문명의 패러다임을 다시 한 번 뒤집고 있다. 이제 쉼터를 넘어서, 인간존중의 문화를 새 시대에 맞게 고양해 줄 재충전의 공간으로 가정을 생각해본다. 그러한 가정에서 인격적 정체성과 문화시민의 자질을 갖춘 인간을 길러낼 때 우리는 새 시대를 성공적으로 개척해갈 수 있을 것이다.